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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를 예술로 만든 이신자를 아시나요?

이름건축가 2025. 3. 27.

자수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섬유예술 1인자, 이신자의 답은 ‘예’였다

한 땀 한 땀의 실이 쌓여 새로운 조형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이신자 작가를 통해 처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자수는 여성의 일이었다?

 

오랫동안 자수는 가정의 영역, 여성의 조용한 손끝에서 태어나는 장식적 공예로 여겨졌습니다. 실과 바늘, 천과 시간. 이 모든 것들은 예술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됐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자수를 당당히 예술의 무대 위로 끌어올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신자 작가입니다.


이신자, 섬유예술을 열다

이신자 작가
섬유예술 1세대 이신자 작가

이신자는 한국에서 섬유예술이 ‘미술’이라는 이름을 얻기 시작한 최초의 세대입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그림보다 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매체로서 ‘실’을 발견합니다. 실은 그녀에게 붓이었고, 천은 캔버스였으며, 바느질은 생각을 그리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수를 단순한 장식이 아닌 감정, 사회, 시대를 담는 매체로 바꾸었습니다.


밀포대, 방충망, 벽지… 일상이 예술이 되다

이신자의 예술에는 특별한 재료가 등장합니다.
방충망, 벽지, 밀포대, 산업용 천…

누군가에겐 버려지는 것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예술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실은 일상의 물성을 통과해 새로운 형상으로 재탄생했고, 단순한 자수를 넘어선 텍스타일 아트로 확장됐습니다.


“자수를 망쳤다”는 비난, 그게 시작이었다

그녀의 작업이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자수를 망쳤다”는 말이 따라붙었고, 전통을 해친다는 비난도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이신자는 한 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 자수에 ‘조형성’을 더하며 현대미술로 전환시켰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수를 예술로 보는 시각’이 이신자의 저항에서 시작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에 태피스트리를 소개한 선구자

 

1970년대, 이신자는 태피스트리(Tapestry)를 국내에 소개했습니다.
이는 천을 엮어 이미지를 만들고, 실로 공간을 장악하는 작업입니다. 당시로선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그녀는 이에 조형성과 내러티브를 더해 한국 텍스타일 아트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조용하지만, 강렬했습니다.
색과 질감, 빈 공간과 촘촘한 실밥 하나하나가 세상과 대화하는 방식이었죠.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이신자의 귀환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그녀가 50년 넘게 쌓아온 실의 여정이 조명되었고, 방문객들은 자수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지적이며, 시적인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단순한 회상이 아닌, 한국 현대미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실마리였죠.


실로 써 내려간 미술사, 그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신자 작가는 2021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작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자수의 가능성은 오늘날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고, 실과 천을 매개로 한 실험은 여전히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반짝이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이신자의 작업은 묻습니다.
“자수는 왜 예술이 될 수 없었는가?”
그리고 스스로 답합니다.
“된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

우리는 이제 실로도 저항할 수 있고, 천으로도 해방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처음 열었던 사람, 그녀의 이름은 이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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