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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태를 바라보는 폭싹 속았수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름건축가 2025. 4. 7.

말할 수 없어 더 오래 남은 상처, 숨겨진 제주 4·3

“작별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4월 3일.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 속에서 제주 사람들의 마음은 유난히 무겁다.
해마다 돌아오는 이 날은 누군가에게는 기억하고 싶은 봄이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기억해야만 하는 고통의 날이다.
그 이름, 제주 4·3.


잊히길 강요당한 역사, 숨겨진 진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약 7년간(1954년까지) 이어진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빨갱이 소탕이라는 구실로 수많은 양민이 총칼에 쓰러졌고, 가족을 잃고, 이름조차 제대로 묻히지 못한 채 땅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 비극은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역사’였다.
말하면 안 되는 것,
기억해서는 안 되는 것,
묻고 또 묻어야 했던 것.

수십 년간 침묵은 강요되었고, 그 침묵 속에서 제주 사람들의 고통은 오히려 더 뿌리 깊게 남았다.


『폭싹 속았수다』 – 일상의 언어로 드러난 제주인의 절망

 

제주 방언으로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는 뜻의 『폭싹 속았수다』는
한 마을을 중심으로 평범했던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4·3 사건은 정면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회피가 곧 증거다.
사람들의 말투, 눈빛, 어색한 침묵,
무언가를 회피하는 태도 속에 숨겨진 공포와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작가는 생활 언어지역적 감성을 빌려온다.
독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남았는가’를 중심으로 상처의 크기를 짐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문학이 어떻게 사실의 재현이 아닌 감정의 기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작별하지 않는다』 – 말하지 못한 이름들을 위한 애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의 학살을 다뤘던 작가가
이번엔 제주의 학살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쓴 소설이다.

소설의 중심은 살아남은 여성, 정심이다.
1948년 가시리 학살 당시 아이들과 함께 동굴에 숨어 있었던 그녀는
결국 아이들을 잃고 평생 말을 잃는다.

정심의 딸 인선과, 그녀의 친구 경하는
그 침묵 속에 갇힌 시간을 마주하며, 기억을 되짚고,
사라진 이름들을 찾아 나선다.

여기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말은
죽은 이를 쉽게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지워진 역사와 끝내 작별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문학적 저항이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어떻게 문학의 언어로 복원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조용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제주가 겪은 고통을 "기억의 윤리"로 되새기게 한다.


왜 제주 사람들은 아직도 괴로워하는가?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은 죽음의 기억이 아니라, 침묵의 기억이다.
죽음은 애도될 수 있지만, 침묵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4·3은 단지 과거가 아니다.
말하지 못했던 고통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형 사건'이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게는 4월이 아직도 조용하고 무겁다.
자식, 형제, 부모를 잃고도 제대로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기억은
오늘도 제주의 바람에 실려 조용히 울고 있다.


문학으로 남은 기록,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

『폭싹 속았수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서로 다른 문학적 언어로
같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 하나는 제주 사람들의 말과 표정으로,
  • 다른 하나는 말을 잃은 자의 고요한 복원으로.

이 두 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이 슬픔을 기억하고 있는가?"


마무리하며

4·3 사건을 말하는 건, 단지 과거를 밝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기억을 선택하는 일,
그리고 다시는 같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다.

벚꽃이 피는 4월.
우리는 제주가 아닌 곳에 살고 있어도,
그날의 봄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문학을 읽고, 문학을 통해 또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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